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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사망설 후계자 백두혈통 김평일은 누구인가?

by 커사남 2020. 5. 1.

 

 


1. 소개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의 아들. 즉, 김정일의 이복동생이다.

 


2. 개요


젊었을 적 김일성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김정일과 암투를 벌인 적이 있으며, 결국 김정일에게 패배해 권력다툼에서 밀려났다. 동시에 김평일의 어머니인 김성애까지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는 곁가지[1]흑역사 취급을 당해왔는데 김일성 사망 직후에는 갑자기 생활비도 대주지 않아 죽은 듯이 숨어서 살았다고 한다.

참고로 김정일은 김성애와 그녀의 자식들을 평생 곁가지로 취급했다. 김정일은 김성애를 한번도 어머니라 부른 적도 없고 마주치기조차 싫어했으며, 김경진, 김평일, 김영일을 형제 남매로 여기기는커녕 형님이나 오빠라고도 부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늘 '수령님에게는 아들 하나, 딸 하나밖에 없다'고 말했으며, 1991년 김경희가 중앙당 경공업부장이 되었을 때 '수령님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니 잘 도와주라'라고 했다고 한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는 누나 김경진과 동생 김영일은 독일 주재 대표부의 참사관으로 나가있다가 2000년 간질환으로 죽었고, 누나 김경진은 오스트리아 주재 북한 대사 김광섭의 아내로 빈에 살고 있다.

김정일에 비해 김일성을 매우 닮았으며(얼굴, 목소리 등), 관록 있는 미남형의 이목구비와 북한에서는 드문 180cm의 장신, 거기다 성품도 원만한 편이라 숙부 김영주를 비롯해 혁명 1세대 원로들의 호감을 샀다. 그들은 김평일을 보면 김일성의 젊었을 때와 판박이라며 아주 좋아했다. 그때만 해도 다들 다음 후계자 자리는 김평일이 이을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환갑 때 항일 빨치산 1세대 원로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김일성이 "나의 아이들이 있는데, 누가 다음을 이어야 할지" 넌지시 묻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확실히 후계자를 낙점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김평일이 되겠거니 생각하고 있던 대다수의 원로들이 침묵을 하고 있는 와중, 가장 김일성이 총애하고 아꼈던 최현[4]이 입을 연다. "당연히 다음 대에는 수령님 장손이 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자가 있는데 다른 누가 한단 말입니까." 그러자 말을 들은 김일성이 고개를 한참 끄덕인 후, "그래요? 다른 의견 없습니까?" 묻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김일성의 가장 친밀한 좌상인 최현이 김정일을 대놓고 지지하는데, 어느 누가 감히 나서서 "아닙니다, 안돼요. 그만두고 김평일이 합시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후계자 문제 잘못 거론했다가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은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그때부터 김정일로 권력승계가 쏠리게 되었다고 한다.[5] 그렇게 북한판 조식이 탄생하였다

물론 김평일이 후계자의 위치에서 밀려난 일의 원인이 단순히 그게 전부일 리가 없다. 여기에는 김평일의 어머니인 김성애가 김일성과의 사이가 점차 틀어졌던 점도 작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에 김일성이 인민대학습당 건축을 위해 선정해둔 부지가 있었는데, 그 곳에 김성애의 남동생인 김성갑이 집을 짓고 말았다. 이에 화가 난 김일성이 김성갑을 불러내서 꾸짖자 앙심을 품은 김성애가 김일성에게 거칠게 항의하였다. 이 일로 김일성의 기분이 크게 상해있던 틈에 약삭빠른 김정일이 이를 노리고 김성애 일가의 비리를 낱낱이 조사해서 김일성에게 보고해버렸다. 이로 인하여 김일성이 김성애는 물론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김평일도 멀리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북한의 육군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김일성 종합군사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군 지휘관으로 복무한 경력도 있다. 대학 재학중이던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으로 전쟁위기가 고조되자,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군 입대를 독려하는 연설을 한 뒤 자신부터 인민군에 자진입대했다는 사실은 꽤나 유명하다. 이런 점들 때문에 군경력이 전무한 김정일[6]이 이복동생에게 심한 컴플렉스와 질투심을 느꼈을 것이라는 추측도 많다.

이렇게 어렸을 적엔 김정일보다 후계자로서의 입지가 우세했고, 김일성도 김평일이 어렸을 적엔 자신의 후계자로 김평일을 낙점하는 듯한 뉘앙스의 발언을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생모가 일찍 요절한 김정일의 입장으로서는 계모 김성애가 마음에 들 리도 없을 것이고(…). 그 후 김성애가 정식 부인이 되어 정치적으로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을 격하시키는 작업에 착수했기 때문에 김정일은 성장 후에도 김성애에게 큰 반감을 가졌다. 김평일을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후계자로 공인되고 권력을 잡은 김정일은 김평일의 존재를 두려워하였으며, 차후 그의 후손 및 세력이 북한에서 권력다툼의 씨앗이 될 것을 우려하여 김평일이 정치권에서 세력을 키우지 못하도록 외교관으로 임명해서 외국으로 쫓아 버린다.

1979년 주 유고슬라비아 주재 무관으로 발령난 이후로는 한번도 귀국하지 못하고 가족들과 40년째 유럽을 떠돌았다.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를 거쳐 폴란드 대사로 1998년부터 16년을 부임하다가 2015년 1월 체코 대사로 전보됐다. 십수년간 멀쩡히 있던 폴란드에서 갑자기 체코 대사로 옮겨간 이유는, 폴란드 주재 외국 외교관들 중에서 김평일의 부임 기간이 제일 길어 자연스레 김평일이 외교단장이 되어 폴란드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자 김정은이 이를 불쾌하게 여겨서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던 김영남[8]에게 교체를 명령했기 때문이다.

 


3. 근황


위에 언급했듯이 해외(주로 동유럽) 주재 대사 자리를 계속 돌았으며 사실상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유배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정일은 김평일에 대해 느끼는 적대감이 강했다고 한다. 실제로 김정일은 김평일과 어린 시절 같이 사진을 찍었던 인물들을 하나하나 다 찾아내서 모조리 숙청시켰다고 하며, 누가 김평일과 한 마디라도 수상한 대화를 한 일이 김정일의 귀에 들어가는 경우 북한에서는 곧바로 그 사람을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탈북한 한 북한 관료는 "파티에서는 항상 김평일 주위에 1m의 공백이 있었다. 아무도 그와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고영환도 자신의 외교관 생활 때 해외에서 만났던 김평일은 북한 내에 그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으며 오로지 북한 노동 신문을 통해서만 북한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김평일이 하루동안 무엇을 하는지를 그에 곁에 붙어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감시자들은 시간별로 김평일의 행적을 기록해 당에 보고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번은 자신이 당 회의에 회의 시간보다 늦게 들어갔지만 뒤에 자리가 많이 남아 있어 이상해서 확인해 보니 그 빈자리들 중 한 가운데에 김평일이 있었다고 말하며, 김평일 자리 양쪽으로 6자리씩 그리고 앞뒤로 3자리씩 비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원형탈모 같은 느낌이였다고 한다. 또한 김정일은 곁가지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하얀색 벤츠를 줬는데 그 벤츠는 북한 내에서 곁가지들에게만 지급되기 때문에 김평일이 탄 하얀색 벤츠가 오면 북한 주민들이 "여기 곁가지가 왔다갔습니다."라고 당에 보고하였을 정도로 일거수일투족이 철저히 통제된 삶을 살았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김평일은 그와 얼굴도 보고 싶지 않은 대사관 직원들에게 자꾸 다가와서 말을 걸거나 내부 행사때 싫은 티를 내도 모른 척 끼어드는 경우가 많아, 대사관 직원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와 얼굴만 마주쳐도 몇분 몇초 단위로 무엇을 했는가 철저하게 보고해야 하는데다가 이상한 오해라도 생기면 바로 큰일이 나기 때문인데, 그래서 김평일은 직원들에게 천치 취급까지 받는다고 한다. 그나마 숙부 김영주의 보호막이 없었더라면 김평일은 물론 그의 형제들과 친모 김성애까지 어떤 비참한 일을 당했을지 모른다고 한다.

여러모로 보이지 않는 흑막의 이미지가 강한 김정일의 정치 스타일에 비해 전격적으로 대중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타입.

2011년 7월 1일 가택연금 상태라는 뉴스가 떴다. 5월에 입북해서 현재까지 가택연금중이라는 설이 있었는데, 2011년 10월 폴란드에 체류하고 있다는 기사가 떴다. 둘 중 하나는 오보였던 모양.

그리고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의 사망으로 인해 중대한 인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신지도부에 의해 잠재적 위협으로 낙인찍혀 더더욱 요주의 대상이 될 수도, 반대로 북한 내부 혼란을 틈타 새로운 권력의 한 축으로 자리잡게 될 수도 있는 것. 김일성 직계이면서 삼촌관계인 김정일의 아들들보다 더욱 정치적으로 경륜이 있기 때문에 향후 그의 행보를 무시하기 어렵게 되었다. 북한판 연정토? 변수는 북한 군부의 동향.

2013년 11월 기준으로는 여전히 겉도는 쩌리 신세이다. 2013년 초엔 폴란드 대부업체한테 돈 빌린 거 갚으라고 북한 대사관이 소송까지 걸렸다. 법원에서 기각하긴 했지만. 앞으로도 권력에 가까워질 일은 없어 보인다. 북한에서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외교관으로 인생 마칠듯. 사실상 북한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전혀 없다. 설령 돌아온다 하더라도 지지세력들이 없는 상황에서 권력주변에 가깝게 가기는 불가능하고, 무엇보다 김정은이 통치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보더라도 북한으로 돌아올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아버지 김정일에 의해 '곁가지'로 낙인찍혀 유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한 작은아버지 김평일을 36년 만에 평양으로 들어오게 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여기에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까지 북한지방선거장에 등장한 모습을 공개했다. 상당수의 전문가들은 현재 진행되는 공포정치를 통해 통치기반을 잃을 것을 우려한 김정은이 이 두 인물을 통해 정통성을 인정받고 정권안정을 시도하려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어쨌든 이후로는 김정남과 장성택이 죽고 어머니 김성애마저 사망한 와중에도 별 일 없이 외교관으로 잘 지내고 있다.

2019년 11월에 사실상 완전히 유배를 끝내고 평양으로 귀국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같은 해 12월 국가정보원에서 김평일이 북한으로 귀국했음을 공식 확인했다. 고영환은 김평일이 북한으로 송환된 이유를 사실상 김정은이 시한폭탄을 제거하기 위함이였다고 주장하며[10] 김평일은 이후 자신의 집에서 좋은 음식은 제공을 받겠지만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서 쓸쓸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3.1. 권력 복귀 가능성?


2020년 4월 중순 김정은의 신변이상설이 확산되는 가운데, 대한민국의 탈북자 출신 국회의원 태영호는 김정은의 유고시 그가 북한의 차기 최고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후처 소생이라고는 하지만 누가 뭐래도 김일성의 아들인 데다가, 나이도 아직 60대 중후반이라서 정치지도자로서 활동할 여력이 충분하기 때문. 이에 비해 김정철은 정치와 거리가 멀고, 김여정은 여성인 탓에 참모로는 몰라도 보수적인 북한 체제에서 지도자로 전면에 나서기는 불리하다는 논리다.

태영호는 김평일이 차기 최고지도자가 된다면 북한은 과거 김일성, 김정일 시대와 같이 안정적인 체제를 구축할 수 있으며, 김정은 시대와 같은 잦은 대규모 숙청 사태는 거의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 이유로는 김정은은 해외유학 생활을 보내다 와서 북한 국내 엘리트들과 접점이 거의 없이 국내에 신뢰할 만한 세력이 김여정, 김경희와 같은 친인척밖에 없었지만, 김평일은 젊었을 적 북한 사회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고, 특유의 친화적인 성격과 수령 김일성의 아들이라는 배경으로 특히 북한 군부로부터 두터운 신뢰와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 건강문제가 우려되는 김정은과 달리 김평일은 건강상태도 매우 좋아서 그가 일단 집권하게 되면 향후 2~30년간 북한 내부는 매우 안정되고, 핵개발도 강화되는 등 통일은 더욱 멀어질 우려가 크다는 것이 태영호의 주장이다. 

반면 유력 연구기관, 대학의 북한 전문학자들은 김평일의 권력 복귀 가능성에 회의적인 견해를 나타낸다. 이미 오랫동안 유배나 다름없는 외교관 생활을 하는 동안 평양 권력계에서 소외되어 자기 세력을 구축하지 못했고, 북한 주민들에게도 존재감이 없거나 한물 간 과거의 인물로만 인식되어 있는 탓에 차기 권력자로 불리한 위치라는 것.